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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아우그스불그 제국 의회에서 군주들과 여러 시 대표들이 황제 칼 5세에게 바친 글 (1530 )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오며” ( 119:46)

 

소개의 말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 (AC)는 루터 교회의 신앙고백문들 가운데서 가장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거의 모든 루터교 크리스찬들이 소중히 여기며 사용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서가 나오기 까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친 바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칼 5세는 1530  4월에 독일 아우그스불그 시에서 제국 의회를 열기 위하여 그해 이른 봄(1 20)부터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적() 인 터키인들에 대항하여 가질 군사 행동과 행정에 있어서 연합 전선을 펴고 또한 종교 개혁의 결과로 국내에 초래된 종교적 분열 상태를 종결짓기 위하여 이런 모임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목적으로 황제는 제국 내의 여러 자유 도시의 제후공(諸侯公)들과 대표들을 초청하여 모든 사람의 의견과 생각과 주장이 묵살되는 일이 없도록 종교적인 여러 가지 상이점(相異點)에 관하여 논의함으로써 분열을 지양하고 연합을 이루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황제의 초청을 고려하여, 독일 색손 주()의 선제후는 그의 관할 지역내의 교회의 신조와 종교 행사 등에 관하여 평가를 하도록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부탁하였다. 

사실 1529 년 여름 (7  26  -9  14)에 이미 슈바바흐 신조(Schwabach Articles)라고 알리워진 교리 해설문이 루터와 멜랑히톤 등에 의하여 준비되어 그해 10월에 제출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그 후 색손 지방 내 교회 간에서 변경된 점들에 대한 추가 항목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추가 부분이 비텐베르크 신학자들 루터, 멜랑히톤, 요나스,  부겐하겐]에 의하여 준비되어 1530  3 27 일에 톨가우 집회에서 색손 선제후 요한에게 제출하여 인준을 받게되었다. 

이것을 보통 톨가우 신조(Torgau Articles)라고 부르는데, 그 원본이 1830 년 바이말에서 발견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슈바바흐 신조와 톨가우 신조, 말부르크에서의 15개 조문을 기반으로 하여 장차 황제에게 제출할 수 있는 문서를 준비하되, 색 지방뿐만 아니라 모든 루터교를 위한 공동 신조가 될 수 있는 신앙고백 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로마 교회 신학자 요한 엑크의 404 논제”라는 것이 공개되어 개혁자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든 바 있었다.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렇게 구상한 고백서 가운데는 루터파 신도들을 다른 반() 로마교파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한편 로마 교회와의 상이 점보다는 유사점을 강조할 필요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의 반성에 대한 희망이 아직까지 적지 않았던 때인지라, 이 문서의 어조는 대체로 우호적이며 온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이 필립 멜랑히톤의 손에 의하여 준비될 신앙고백서의 성격을 결정하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는 그 내용상으로 보아, 슈바바흐 신조가 그 첫부분의 골자가 되었고, 톨가우 신조가 둘째 부분의 주요 내용이 된 셈이다. 

말틴 루터는 당시 파문을 받은 중이었으므로 의회에 나올 수 없었고, 코부르크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신을 통하여 자문에 응하였던 것이다. 비록 루터 자신이 쓰지는 않았으나 신학적으로 보아 루터 자신의 입장을 잘 말하여 주는 글이다. 

정밀을 기하는 고전학자 멜랑히톤은 1530  6 25일 황제에게 이 신앙고백서를 정식으로 봉정하기 바로 직전까지 교정과 수정을 계속 가하였다. 

일곱 명의 제후들과 두 자유 도시의 대표들에 의한 서명으로 비로소 이 고백서는 하나의 공적인 신앙고백서 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우그스블그 신앙고백서는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 객관적인 보편성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으로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강조, 자유의 소중성, 초대 기독교 정신의 계승 등을 말할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보아 결코 어떤 새 교리를 논한 것이 아니라, 지난 여러 세기를 거쳐 주님의 교회가 가르쳐 온 기독교 신앙의 중심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의 가르침과 성서의 기본적 교의(敎義)를 재강조했을 따름이다. 

서문 외에 2부로 되어 있는데, 1 (1-21 )에는 복음주의 교회의 교리에 관한 주요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곧 하나님 ( 1 ), 인간 (2,18, 19), 속죄 (3, 21), 의인(義認:  4), 은총의 수단 (5), 새 복종 (6, 20), 교회 (7, 8), 성례전 (9-13), 일반 목사직 (14), 교회의식 (15), 정부 (16), 마지막 날 (17)에 관한 교리 들이다. 

2 (22-28)에는 성례전, 사제의 결혼 문제, 미사, 참회, 전통, 수도 서약, 교권 등에 관련된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점들과 악습에 관한 시정 사항이 취급되어 있다. 

이 신앙고백서처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입장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글이 없는 줄 안다. 

그러므로 이 고백서는 루터교 뿐만 아니라 많은 개신교 교파들에 의하여 한결 같이 존중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은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의 깊은 관심을 끌고 있다.

 

1530 6 25일 오후 신앙고백서를 낭독할 시간이 되었을 때, 선제후, 귀족, 제왕, 제후, 교직자, 자유시의 대표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 관계 있는 수백 명의 청중이 실내외에 가득차 있었다. 

황제 칼 5세의 숙소로 지정된 대감독의 궁전 실내에 준비된 프랫폼에는 황제 칼 5세가 정좌하고, 좌우에는 색손 공과 펄디난드 왕이 앉

아 있었다. 

요한 엑크도 동석하였다. 

정각 4시가 되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일어섰다. 

그리고 황제의 지시에 따라 곧 착석하였다. 

라틴문과 독일문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가져왔다.

 황제는 라틴문의 낭독을 요구했으나, 색손 공은 “저희들은 지금 독일 영토 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독일 문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하였다. 

이 청이 수락되어 독일문이 색손 지역 고문 크리스찬 베엘 박사에 의하여 낭독되었다. 

전문 낭독에 두 시간이나 걸렸다. 황제, 왕공, 제후, 감독들 모두가 경청하였다. 

23조에 이르러 마인즈 감독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때 펄디난드 왕은 마인쯔 감독에게 “사실인가?”라고 따졌다 한다.

낭독이 끝난 후 두 개의 고백서의 원본이 궁정 비서관에게 전하여 졌고, 곧 이어 마인쯔 선제후에게 전하여 졌다가 황제에게 봉정 되었는데, 그는 독일 문을 마인쯔 선제후에게 돌려주고 라틴문은 황제 자신이 지참하여 브러셀 황실 문고에 두었다 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두 개의 원본은 모두 분실되어 현재 찾을 길이 전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비록 원본들은 분실되었으나, 멜랑히톤은 이듬해 5월 친히 라틴문의 믿을만한 사본과 자기의 독일문 원고를 합하여 “변증서”와 함께 비텐베르크에서 출판하였다.

이것이 곧 1531년 표준판 (edition princeps)이다. 

그리고 1530년대에 나온 것 중에서도 50개 이상이나 발견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는 6 25일 전까지 준비하는 동안에 사용된 여러 단계의 것으로 여겨지는 문헌들과 또한 6 25일 이후에 변경된 부분이나 용어가 포함된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 문의 저자로 알려진 멜랑히 톤은 사실상 그 후의 모든 인쇄판을 변경시킬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더러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칼빈파 사람들에게 좀더 만족을 주기 위하여“Variata"로 알려진 1540 년도 수정판을 작성한 듯하다. 

 Variata”는 그후 루터교 내에서 계속 논쟁의 핵심이 되어 갔다. 

어떤 루터 교단들은 그들의 헌장 가운데, 수정과 변경을 가하지 않은 “무수정판”을 채택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어쨌든 그 후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독일어와 라틴어 판이 모두 정밀히 연구되어 애당초 황제에게 봉정한 것과 거의 꼭같은 본문을 내놓게 되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한국어판을 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개혁자 루터의 정신에 다시 한번 접하게 되기 바란다. 

여기 실린  AC 의 본문은 본인(지원용박사)의 번역으로 1965년에 소책자로 출판된 것에 극히 부분적인 수정과 편집을 가한 것이다.

이 역서의 본문으로는 Concordia Triglotta (1921)에 취급된 라틴문 및 독일어판, T.G. Tappert 의 편역인 The Book of Concord 에 포함된 영어로 된 본문을 사용하였다.

I, Die 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Goettingen, 1952) 도 참고하였다. 이 소개의 말을 위한 보충이 필요할 경우 이상의 문헌 XV-XXI 을 참고하기 바란다.

 

글.지원용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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